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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경
덕수궁과 정동길 본문
뒤로 보이는 문이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
앞쪽에서 사람이 많고 복잡하여 못 담고 안으로 들어와서 찍은 대한문입니다
대한문은 원래 '크게 편안하다'라는 뜻의 대안문 이었어요. 그러다가 1906년 수리와 함께 '한양이 창대 해진다' 라는 뜻의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고종의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덕수궁이 근대사의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대한제국이 영원히 창대 하리라는 염원을 그 이름에 담게 된 것입니다
.
중화전
중화전의 품계석을 보면 이 곳에서 대한제국의 공식적 행사를 치웠음을 짐작해볼 수 있어요.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들의 접견 등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중화전 앞에 보이는 돌들이 품계석으로
정일품 정이품... 이런식으로 새겨져 있다
덕홍전
석어당은 덕수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층건물로 단청을 하지 않아서 소박한 살림집 같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한옥이 2층으로 지어져 있으니 신기했어요. 안쪽으로 보면 나무 계단이 보입니다.
이곳에서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이외,함령전·즉조당·준명당(浚明堂)·정관헌 등이 있는데 눈으로만 보고 복잡하여 사진은 담지 못했습니다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대부터 1910년에 거처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 입니다.
경운궁에서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해요.
1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시설로, 2층은 대접견실과 대기실로, 3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대미술관
2014.10.28 화
끝에서 두번째 이화여고 정문 오른쪽에 커다란 은행나무
끝에 오른쪽에 학교의 담장 돌담길을 다시 쌓은 듯 보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쯤 은행잎이 샛노랗게 변했을 것이다
위 사진들은 마음에 들지 않은 부족한 사진들이라
올릴까 말까 하다가 담아온 것이라 올려봅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궁궐.
덕수궁(조선) 전경, 사적 제124호, 서울 중구 정동
사적 제124호.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行宮)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 침전인 함령전(咸寧殿), 보문각(寶文閣)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및 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大安門)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 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중앙에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전의 뒷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으며,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령전이 있다. 함령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이 있으며,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다.
정문인 대한문은 궁궐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전인 중화전의 주위에 회랑이 없어 다른 궁궐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현재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중화문·함령전·즉조당·준명당(浚明堂)·석어당·덕홍전과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과 정관헌 등이 남아 있다.
서양식으로 세워진 석조전과 정관헌은 주변의 한식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건축양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궐의 본래 모습이 상당히 손상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조선왕조의 궁궐로 본래 일반사가의 집을 궁궐로 꾸몄기 때문에 규모도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1910), 덕수궁에 있는 근대서양식 건축물
덕수궁 안에 있는 근대 서양식 건물. 영국인 J.M. 브라운의 발의에 의해 1900년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기본설계는 영국인 G.R. 하딩이,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공사감독은 한국인 심의석(沈宜碩),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小川陽吉], 영국인 M.H. 데이빗슨 등이 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정관헌
정관헌(1900 이전), 전통목조건축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
덕수궁 안에 있는 양관(洋館) 가운데 하나. 함령전 북쪽에 있으며 1900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종의 연유(宴遊)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양옥이라고는 하나 팔작지붕 등 전통목조건축의 요소가 많이 있다.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바깥두리기둥은 처마를, 안두리기둥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지붕은 안두리기둥이 받치는 부분까지만 팔작지붕을 씌우고 바깥두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부분은 지붕을 덧달아내어 퇴를 만들었다. 안쪽의 독립기둥은 기둥 밑부터 기둥 머리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기둥 머리는 둔중한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풍으로 만들었다. 베란다에 두른 나무기둥과 처마장식 및 동제 난간이 매우 정교하다. 전체적으로 전통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절충된 특이한 건물로서 근대 서양식 건축의 도입을 보여주는 건물로 주목된다.
덕수궁 중화전
중화전(1905 중건), 덕수궁의 정전, 보물 제819호
덕수궁의 정전.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앞면 5칸, 옆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높은 2층 월대 위에 세워졌다. 기단에 회랑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두었는데 남쪽 계단 앞에는 품계석(品階石)이 각각 12개씩 배열되어 있다. 원형 주좌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올린 다포계로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궁궐건축의 상례를 따르고 있다. 외부 살미첨차는 3중으로 앙서를 조작하였고, 기둥머리에는 후기 건물에서 흔히 쓰는 안초공(按草工)을 두어 기둥머리의 허전함을 덜고 있다. 가구(架構)는 2중량 구조이며 2개의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있다. 뒷줄에 있는 고주 사이에 어좌(御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닫집의 천장에는 쌍룡(雙龍)이 새겨져 있다.
2014.10.28 경복궁에 갔으나 화요일은 휴관일이라서
덕수궁으로 왔다
이 길을 옛날에는 자주 등교길에 거닐던 길이었는데
오랫만에 가보았다
아직 단풍이 많이 들지 않아서 아름다움이 덜했고,
정동길에 점심먹으러 나온 주변 회사원들로 인해 사람이 무척 많아서
한적하게 사람들 많이 없을때 다시 와서
제대로 돌담길 사진 구도를 잡고 연습을 해보면 좋겠다
옛자취를 더듬으면서 ,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교회를 지나 정동길을 걸어보았다
학교안을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수업중이라서, 정문에서 지키는 아저씨들 때문에 못 들어가고
문앞에서 서성이다가 돌아왔는데
못 들어가서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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