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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경

덕수궁의 가을2 본문

궁궐 ,전통 미술 조각

덕수궁의 가을2

미소^^* 2024. 11. 19. 18:37

덕수궁은 조선의 역사가 내리막으로 가고 대한제국이 시작하는 어려운 나라의 시기에
왕이 머물던 작은 궁인데 처음에는 궁이 아니었다가 궁궐로 넓히면서 사용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덕수궁이 슬픈 역사를 가져서 애잔하다고도 말합니다.
지금은 시청앞에 공원의 역할을 해주고 쉼터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일제에 의해 많이 파괴되어 사라진 전각들을 복원하는 작업이 덕수궁 뒤쪽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은 아름다운 궁으로 정동의 역사를 뒷바침해주고 있습니다

 

덕수궁에도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금천교가 있습니다 사진상으로 볼때 중앙에 하마비가 세워져있습니다
하마비는 대인 소인은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고 새겨져 있고 제 눈으로 한문으로 씌여진 하마비를 읽었는데 사진은 담았는데 정리하다가 삭제되었습니다

 

 

 

광명문
위치는 함녕전의 남쪽이며,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 사이이다.

 

 중화전

덕수궁 중화문

중화문을 통해 정전인 중화전이 보입니다

덕수궁 정전 중화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전으로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정전 안에서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을 보면 용을 한 쌍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중화전은 1902년에 중층으로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된 것이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중화전 내부

석조전
석조전 - 대한제국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광무 4년(1900)에 착공하여 융희 3년(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하였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덕수궁 현대미술관

덕수궁 석어당
덕수궁의 침전(寢殿)으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다. 건물의 명칭인 석어당(昔: 옛 석, : 어거할 어, 堂: 집 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돌아왔을 때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두산백과
오른쪽에 고목 살구나무. 봄에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2014년 11월 살구나무 단풍든 풍경 담은 사진 

석어당 측면. 살구나무

 

 

 

덕홍전이 왼편에 보이고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동북쪽, 침전인 함녕전(寧殿)의 서쪽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었는데, 뒤에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함녕전 덕홍전 후면
이곳은 봄에 모란이 함박 피어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정관헌
'정관헌'이란 내전(內殿)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이다.
1900년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였으며,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휴식을 취하거나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돈덕전 ㅡ대한제국의 영빈관
100년만에 복원되었고 내부에는 영빈관 시설을 재현해 놓았으며 근대시기 사진들을 전시해놓았습니다

 즉조당 후면

 준명당과 즉조당은 복도로 연결 되어 있으며 준명당은 고종이 외국신하를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전까지 1914년 딸인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즉조당은 15대 광해군과 16 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라 합니다
 
덕수궁
사적 덕수궁은 본디 왕궁이 아니었다.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1454∼1488)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왕궁이 모두 불타서 1593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임금은 의주로 피난 갔다가 한양으로 환도한 뒤 덕수궁에서 머물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옮긴 이후 270년 동안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이곳을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즘 와서는 경운궁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덕수궁엔 지난날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18,635평의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 중화전, 광명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홍전 및 석조전 등에 불과하다. 덕수궁은 특히 구한말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여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3·1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