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세요 원하던 그 장면
박지성은 그라운드에서 뛰기 전 몸을 풀며 워밍업을 한다. 오디오 마니아는 음악을 듣기 전 최상의 음질을 즐기기위해 오디오를 미리 켜놓고 기계를 데우며 예열을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바로 이런 몸 풀기가 필요하다. 웬 엉뚱한 소리냐고? 좋은 사진을 얻으려면 오랫동안 카메라를
쥐고 상상(想像)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인천 강화 교동면에 있는 작은 섬마을 교동도를 찾아갔을 때가 딱 그랬다. 주제는 '빈티지 여행'. 다
시 말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낡고 오래된 마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마을에 들어서기 전부터 미리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저 섬은 어떤 모습일까', '
저 마을 안에서 난 무엇을 보게 될까'. 이 과정 없이 무작정 셔터를 누르면 그야말로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만 찍
게 된다. 보다 흥미진진하고, 그 뒷이야기가 궁금한 사진을 찍기 위해선 미리 머릿속에서 어떤 상황을 찍게 될지
떠올려보고 고민해야 했다.
- ▲ 골목만 찍은 모습은 밋밋하다(왼쪽). 그 안에 멀리뛰기를 하는 아이가 들어오니 비로소 상상했던 사진이 완성됐다(오른쪽).
돌고 나니 맘에 드는 장소가 하나 나왔다. 작은 시장 어귀 골목, 빗물에 오래 절어 얼룩진 슬레이트 벽 사이
로 붉은 기와 지붕과 하얀 회벽을 지닌 집 한 채가 보였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초록색 테이프가 감긴 낡은
환풍구까지.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은 이 마을의 느낌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골목만 찍으려니 어쩐지 재미가 없었다. 다시 상상을 시작했다. 이런 오래된 골목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다방구' 또는 '오징어포' 같은 추억의 놀이를 하는 아이가 한두 명쯤 나올 것 같았다. 그 아이가
바로 저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장면을 찍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무작정 셔터를 누르지 말고 기다리려 보자는 생각이 든 것도 이때였다. 다시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30분쯤 다른 곳을 어슬렁거리다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아하, 이런 행운이. 누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기분. 아이 하나가 골목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고 조금 더 버텼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가 혼자 멀리뛰기 놀이를 시작했다.
찰나를 낚아챌 때가 온 거다.
셔터스피드를 빠르게 조정했다. 1/250초. 찰칵. 아이가 그렇게 골목에서 폴짝 뛰었다. 상상했던 장면이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