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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의 풍경
창덕궁 2 낙선재 일원 본문
이곳은 낙선재 들어오기전에 위에 담장에 있는 승화루인데
이 지역은 동궁영역에 포함된 부분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왕실을 탄압할 목적으로
창덕궁 경찰서로 쓰였다고 합니다
여기를 지나면 낙선재로 이어지는 곳이다
담장을 끼고 낙선재 외벽이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상량정이다
이것은 육각정자로서
1908년 융희년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일제시대에 만들어 진것으로 동궐도에 나타나 보인답니다
천장에는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고
궁궐의 소규모 정자로는 이례적으로 치정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낙선재 입구 담장
낙선재로 들어오는 문인데
왼쪽이 장락문으로 정식 문이고 오른쪽도 일반인이 다니는 문
왼쪽 위에 보이는 전각이
상량정이고 앞쪽은 낙선재
길이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장락문으로 들어서면 낙선재가 나오는데
아쉽게도 이곳에서 헌종은 2년 살고 단명하게 됩니다
낙선재
보물 1764호
이곳은 1847년 지어진 건물로
조선 24대 헌종이 1847-1848년 지었으며
낙선재를 통하여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정조의 개혁정치를 본받으려 했다
낙선이란 착함을 즐긴다는 뜻으로
건물이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하고 아름다움이 구석구석 베어있다
원래는 낙선당이란 이름으로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낙선재는 헌종의 집무실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헌종은 정실 명헌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간택한 김제청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
낙선재를 선사했으며,
석복헌은 후궁인 경빈김씨를 위한 처소로 지어졌다
수강재는 순정효왕후를 위해 중수했다합니다
낙선재
앞 마루에서 본 뒷뜰
낙선재 맞은편의 여러개의 방들
석복헌으로 이어지는 문
낙선재 뒷뜰
뒷정원에는 화계와 석탑 굴뚝 등이 있다
뒷뜰에서 본 마루 앞 건물
오른쪽의 둥근 문은 방형으로 된 문 모양과 달리 서양식이 가미된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삼신산에 괴석인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에서 가져온 괴석으로
헌종이 이런 괴석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담장 뒤에 보이는 건물이 상량정
낙선재 뒷뜰에서 상량정으로 연결된 문
낙선재 뒷뜰 입구 출입문
한정당
이곳은 담장 위에 건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담았다
예전에는 이곳을 개방하여 전면을 볼 수 있었다는데
낙선재 후원의 삼신산이나 한정당의 오악은 헌종이 괴석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선재 석복헌 뒷뜰에 높다랗게 올라앉아 속세를 떠난 듯한 별당이다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라고
승정원의 일기는 기록되고 있다
한정당은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건립연대가 명확치 않다
1926년 마지막으로 승하하신 순종임금의 계후인 윤비와
1989년 여생을 마감한 영친 왕비인 방자 여사가 말년까지 살던 곳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취운정 입니다
역시 들어가지는 못하게 담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낙선재 수강재의 후원 화계 위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궁원의 하나로
정면 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2009년만 해도 개방을 해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정당에서 서쪽 위에 보이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잠가두었다
석복헌으로 들어오는 문
문위에 3단 목재 무늬가 특이하다
석복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진 집으로
귀한 후세를 보길 희망하며 기대감이 컸었다고 합니다
외척세력인 효정왕후를 멀리하고 경빈을 가까이 두어
개혁의지를 보이려 했던 것 같답니다
석복헌은 담장도 이중으로 둘러 쌓여서 안온하다고 합니다
헌종이 일찍 승하하자
경빈 김씨는 이곳에서 퇴거하여 다른 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후 순종의 계비 순정효왕후가 이곳에서 생활하다 1966년 사망했다고 합니다
석복헌에서 수강재로 이어진 문
수강재
수강은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는 의미로
정조 9년에 단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지어
수강재라 하였다
효명세자의 별당이었는데 헌종은 석복헌을 지으면서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 순원왕후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중수를 한다고 했지만
경빈과 대왕대비의 처소를 나란히 배치하여
경빈 김씨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와
장차 태어날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헌종의 의지가 담겨있다
순원왕후는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로
1800년 정조가 승하하는 바람에
순조가 즉위하면서 왕비 간택에서 23대 순조비가 되었다
순조 초기에는 1803년까지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였고,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뜬후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열었다
안동김씨 세력은 순조비 순원왕후이후
헌종의 비 효현왕후와 철종의 비 철인왕후까지
안동김씨의 왕후를 들였다
순조비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와 세딸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가 22살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난 후
8살이던 헌종을 대신하여 1834(헌종1)-1840년(헌종6)까지
수렴청정하고
1849년 헌종마저 23살 나이에 후사없이 승하하고 난후 임금 재목을 찾았고
먼먼 왕족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이
정조시절 역모로 엮어 강화도로 유배 갔던 일을 상기하여
자손을 찾도록하여 은원군의 아들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 이원범을
25대 철종으로 왕 등득 시킨뒤
왕의 수업을 받지 못한 철종을 위해1851년 철종3 년까지
수렴청정하였다
순원왕후는 많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친정인 안동김치로 인한 세도정치를 끊고자
나름 며느리 집안인 풍양조씨쪽을 기용하는 등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 무시무시한 세도정치를 지속하게 만든 셈이었다
수렴청정 한 후 1857년 철종 8 에
68세로 승하할때 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또한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1989년 숨을 거둘때까지 살았던 거처입니다
낙선재는 조선말기의 비운의 여인들이 머무른 곳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
슬픈 느낌이 들어요
덕헤옹주는 일본으로 끌려가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그 고통으로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았답니다
정신이 맑은 어느날 한장의 낙서의 글에는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 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1962년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답니다
수강재 오른편쪽과 밖으로 나가는 문
수강재 바깥쪽에서 본 안채
뒷쪽에 보이는 건물이 취운정입니다
수강재에서 나와 끝에 담장에 고목이 우리역사를 말해주는 듯
고목의 회화나무가 서 있습니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나가는 길 왼쪽은 창고, 오른쪽은 행각이라 합니다
창덕궁 낙선재는 헌종이 (1847-1848)에 지은 것으로
헌종의 거처와 서재로 쓰인 본채와 석복헌과 수강재로 연결되어 있다
윗쪽에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 총 9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헌종은 익종과 조비(후일 조대비)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익종을 세살때 여의고 할아버지 순조 마저 여덟살에 승하하시게 되니
바로 조선조 제24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있었지만 정사는 할머니(순조비)가 수련청정하게 되었고
어린 헌종은 몇년을 기다려 장가를 가게 되었는데
세차례에 걸친 간택에서 김조근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6년만에 사별하고 헌종은 낙선된 여인 중에 있던
다른 김여인을 좋아하여 별도 왕혼으로서 후궁으로 맞아들이고
이 김 후궁과의 보금자리를 위하여
낙선재를 짓게 되었다
헌종은 낙선재에 정성을 다 하여 선경을 만들고 사랑하는 여인과
정념의 불꽃을 태우다가 승하하게 되니
왕위에 오른지 15년만이요,
낙선재 생활 2년만에 후손도 없이
2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친다
후궁인 경빈 김씨와 잠시 머물던 곳이요
할머니 순정효왕후가 살던 곳이고,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은 1970년 까지
그의 부인 이방자는 1988년까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는 1962년 일본에서 돌아와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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