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작년 국립국악원 연못에서 담은 연꽃
- 폰으로 담은 보리수
- ㅣ
- 스마트폰으로 담은 사진
- 시흥시
- 휴일 바닷가 풍경
- 폰으로 찍은 사진
- 입대하던날에 핸폰 사진
- 폰으로 셀카 담음
- 핸폰으로 담은 요즘 풍경과 트리들
- 음악감상
- 물왕호수
- 티스토리챌린지
- 시흥명품생태관광지
- 태풍으로 비가 . 비오는 날
- 핸폰으로 담은 사진
- 예술의 전당
- 장마비가 쏟아지는 날에...
- 핸폰으로 담은 사진. 예술의 전당
- 시흥명품생태관광
- 폰으로
- 친정아버지 5주기 기일
- 이순규의 시
- 학교교정에서
- 추석날 오후.성묘
- 물왕벚꽃
- 오블완
- 폰으로 담은 사진
- 스마트폰으로
- 장미 시 한편백만송이 장미 노래
- Today
- Total
내마음의 풍경
창경궁1 본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입니다
보물 제 384호
홍화란 교화 덕화를 널리 한다는 뜻으로 이름은 서거정이 지었고
태조 5년 (1396) 9월 도성의 창축과 함께 건설되었다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황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은데,
임진왜란때 전소되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때도 화를 입었고,
인현왕후와 장희빈,영조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 이야기가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앞에 옥천교와 명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명정문이 보인다
옥천교 들어가면서 우측 교각
홍화문을 지나면 옥천교가 놓여있어 궁궐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 짓습니다
옥천교에 흐르는 물은 경복궁 창덕궁을 흐르는 물로 금천이라 하였으며,
금당수는 창경궁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보물 386호 랍니다
만든 연대는 성종 14년인 1483년입니다
옥천교 들어가면서 좌측
옥천교 중앙에 나티
다리 아래는 두개의 무지개 모양(홍예) 다리를 만들었는데
가운데는 나티라고 부르는 역삼각형에 도깨비 형상이
남쪽과 북쪽 두개 볼 수 있어요
다리를 건너는 모든 이의 안전을 도모 하자는 의미라는데
재미있는 것은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의 도깨비는 험상궂은 표정을,
흘러 나가는 곳의 도깨비는 웃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리 위에는 석수를 세웠는데
홍화문쪽의 두마리는 서로 다리 사이로 마주보고 있고
명정문쪽의 두마리는 명정문을 바라보고 있답니다
앞에는 중문인 명정문이 보입니다
명정전은 조선시대의 정전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국보 제 226호
명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명정전이 바로 보이는데 동향이고,
앞에 품계석이 양 옆으로 서 있습니다
명정전 내부
명정전 왼쪽에 보이는 남향 큰 건물이 문정전입니다
명정문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는 남산 타워가 보이는 것이 시원합니다
좌우에 긴 회랑이 보입니다
명정전을 지나서 내전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작은 문은 영청문입니다
문정전 입니다
정전인 명정전을 바라보고 섰을때 왼쪽에는 편전인 문정전이 있다
문정전은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의 하였고,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과 같은 곳이다
외전 영역에서 유일하게 남향을 하고 있다
1484년 세워졌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광해군 때의 건물을 토대로 1984년 복원하였고,
조선고적도보에는 명정전이1930년대까지 있었으나 사라졌다고 한다
조선 왕조는 유교에 근거해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라는 기본 이념에 충실하기 위해 국정의 근본을
위민 정치에 두었답니다
따라서 국정은 임금의 독단이 아니라 어전회의를 통해 결정한 후 시행했다네요
어전회의는 임금과 삼정승 그리고 여섯 판서가 주축이 되었으면
사안에 따라 더 많은 사람이 회의에 참석 했다는데
안건의 주관부서의 신하가 제안했으며
임금이 제안한 일은 드물었다 합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임금은 거의 신하와 독대하지 않고
항상 사관의 입회아래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그 내용은 기록으로 남겼다고 하니 공정한 일이었지요
사초로 귀한 자료가 되어 조선왕조실록와 같은
실록 편찬에 귀한 자료가 되었답니다
언관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어전회의에서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면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유생들이 시정을 요구했다는데
이들에게는 면책특권이 주어져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목적은 그리 했지만 인간이 운영하는 지라 잘못된 일도 많았을 겁니다
문정문 밖으로 나와서 본 문정전입니다
왼쪽에는 숭문당이 보입니다
영조는 문정전을 다른용도로 사용했는데
죽은 첫째 왕비 정서왕후 서씨의 위패를 모셔놓은 혼전으로 삼은 후
휘령전이라 불렀다
어느날 영조는 죽은 정성왕후의 환청을 들으며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단 말은 역모가 가깝다는 뜻으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떠올린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첫아들을 잃고 마흔 하나의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세자에 대한 영조의 사랑과 기대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특하여 왕을 기쁘게 했으나.
영조는 세자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무섭게 다그쳤는데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세자는 커 갈수록 비행을 일삼았고
정신병과 강박증에 시달렸다
영조의 분노는 나경언이란 자가 올린 고변을 통해 극에 달하고
영조는 세자를 문정전에 부른후 자결하라는 칼을 던져 주었지만
세자는 거절했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못질을 한다
뒤주는 선인문 안쪽으로 옮겨져 뒤주 안에서 사도세자는 숨을 거둔다
훗날 영조는 아들의 묘비에 절절한 슬픔을 토로했다
문정전 앞뜰에는 두려움 속에 죽어간 사도세자의 처절한 외침과
이를 바라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울음소리조차 밖으로 낼 수 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
후회로 가슴치는 아버지의 눈물이 서려있다
문정전의 후면 입니다
문정전 앞에는 넓은 뜰이 ,,,조용히 놓여있네요
보이는 문은 문정문입니다
명정문 뒤로 나오니 숭문당이 왼쪽에 있습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는 곳이라 합니다
약간 경사진 곳에 세워져
출입은 위의 사닞에 보이는 앞쪽에 설치한 누각으로 지어졌습니다
숭문당은 영조가 쓴 어필이라고 합니다
명정전 뒤에서 빈양문으로 나옵니다
빈양문에 들어서면 왕의 일반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빈양문입니다
외전에서 내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명정전에서 함인정쪽으로 가는 천랑
명정전 뒷편에는 천랑들이 층으로 나뉘어져 연결되어 있다
이는 왕이나 궁궐의 어른들이 비를 맞지 않고 이동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이며,
지형에 맞게 계단을 만들고 지붕 역시 층을 나눈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밖에서 본 빈양문
빈양문이 왼쪽에 있구요, 나오면 숭문당 후면이 오른쪽에 보입니다
뒤에는 서울대병원이 보이구요 오른쪽에 빈양문이 보입니다
빈양문 나왔을때 보이는 풍경인데요
창덕궁 낙선재 위쪽 모습으로 보입니다
빈양문에서 나와 보니 왼쪽이 함인정 옆면이구요
함인정 앞에는 환경전이 보입니다
노송이 아름답고 늠름하게 보입니다
앞에서 본 함인정입니다
함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 라는 말입니다
임금이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를 접견했던 장소라 합니다
정자의 바닥은 평평하지 않고 가운데가 약간 올라왔습니다
누각 안쪽으로 네 곳에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편액은 도연명의 사시에 나온 글인데요
춘수만사택 -눈 녹은 봄 물은 못 마다 가득하고,
하운다기봉-여름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마다 걸려있네
추월양명휘-가을 달은 천지를 밝게 비추니
동령수고성-겨울 산봉우리 외롭게 선 소나무는 빼어나구나
경춘전
대비의 침전으로
경춘전에서는 정조와 헌종이 탄생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가 임란후 소실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었으나
순조 30년 불타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경춘전 옆측면이고 오른쪽 담장은 창덕궁 낙선재이다
환경전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승하했을때는
빈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경춘전과 환경전은 지어진 시기가 같다
창경궁의 내전으로 왼쪽은 경춘전, 오른쪽은 환경전입니다
환경전의 후측면
사진 위 아래 4장이 사진 찍는 각도에 따라서 다 다르게 나옵니다
왼쪽이 부분적으로 나온 환경전, 그 앞에 함인정, 오른쪽이 경춘전입니다
가운데 건물이 경춘전 옆측면입니다
통명전 오기전에 양화당 건물이 있는데 공사중이라 완성도면 사진을 옮겨왔습니다
공사중인 양화당
양화당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했으며.
고종 15년(1878년) 철종비 철인왕후가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랍니다
통명전으로 갑니다
창경궁 안쪽 창덕궁과 연결되는 돌계단 아래쪽으로 통명전이라 부르는 전각이 있는데
서북쪽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합니다
대비의 초소나 왕의 침전 겸 연회용으로 지은 곳으로
보물 제 818호
성종 15년인 1484년 세운 건물입니다
임진왜란때 불타고 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지만,
정조 14년에 화재를 당해 전소되었답니다
지금 건물을 순조 34년에 창경궁 재건할때 지은 건물이랍니다
가운데에 나무를 깐 대청이 3칸 있고
양쪽에 온돌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창경궁 전각중에 유일하게 월대 위에 지은 전각이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면에 3개 양옆에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통명전 현판에 어필은 순조 자신이 직접 썼다고 하네요
왼쪽으로 창덕궁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보이구요
왼쪽 옆에는 동그란 샘이 있고, 네모난 연당이라는 연못이 있습니다
가운데 돌다리를 만들어 통행하게 하여서
은하수 오작교를 건넌다는 의미를 갖추게 하였고,
통명전 뒤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서 작은 둥근 샘에 물이 솟아
수로로 흘러 들어온 물은 석구라는 구조물을 통해
연못으로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였답니다
연당은 생태적이고 장식 위주의 연못과 생활 방화용수 공급처로서의
작은 못지로 독특한 구조물이고
맑은 물이 샘솟아 흐르는 연당에는 항상 맑은 물이 넘실거리는 것이
물이 귀하던 시절에는 얼마나 중요하고 좋은 것이었는지
신기하고도 재미났습니다
앙련의 받침대석
명경수 같은 맑은 물이 못안에 유리거울처럼 비친다
연꽃이 피는 시기도 한때라서 예쁘게 찰칵
통명전 뒷 모습 입니다
통명전은 우리도 아는 장희빈과 관계가 있는 건물입니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건이 있는 곳인데
숙종20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된 후 인현왕후를 저주 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바로 통명전 주변에 흉물을 파묻었던 곳입니다
결국 발각되어 장희빈은 취선당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던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영춘헌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연대는 알 수 없다
순조 30년 (1830) 8월1일 오전 화재가 발생하여
환경전,경춘전과 함께 소실되어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가 재건하였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 (1800) 6월 승하하였다
집복헌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다
함양문
창덕궁 후원 옆쪽으로 함양문을 통해 매표를 하고 창경궁으로 들어올 수 있다
궁궐 포스팅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포스팅 하다 보면 빠진 사진도 있구요,
일일히 설명 하나 하나 신경을 쓰며
수정과 보완 작업 역시 얼마나 많이 해야 하는지요
설명을 찾고 사진을 올리면서, 역사를 배우기도 했지만
이리 사진을 모은다는 것이 힘든 작업임에 틀림 없습니다^^
창경궁이 저는 좁다고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번에는 문화재를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창경궁이 넓더라구요 ㅎ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여러번 봤을 때,,, 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습니다
'궁궐 ,전통 미술 조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화 박물관에서 (0) | 2015.08.11 |
---|---|
창경궁 2 (0) | 2015.08.05 |
창덕궁 2 낙선재 일원 (0) | 2015.07.29 |
창덕궁1 (돈화문, 인정전,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 (0) | 2015.07.27 |
경복궁 자료 사진 모음 (0) | 2015.07.22 |